[미술유학_컨셉_오브제의 변화과정]

관리자
202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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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의 변화과정

                   

오브제라는 말이 미술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입체주의(Cubism)’부터 이지만 사실 오브제는 입체주의 이전부터 등장하였으며 오늘날과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미술과 떨어져 본적이 없다. 즉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나 이집트의 조각품에서부터 르네상스 이래의 사실적인 그림을 거쳐 현대미술에 이르기까 지 오브제는 미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온 것이다. 이때의 오브제는 오늘 과 같은 의미가 아닌 대상, 객체로서의 오브제이다.

                   

입체파는 예술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선구적 위치에 있었던 미술사조로써 르네상스 이래로 지속되어 왔던 서양회화의 전통적인 기법인 원근법, 명암법, 단일 시점을 포기하고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의 환 원, 사물의 존재성을 3차원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다수의 시점들을 도입하였 다. 입체파의 오브제는 물질 자체의 구성과 이로 인한 물질의 일상성ᆞ효용성 을 제거하여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인간내부를 자극하는 새로운 오브제의 탄생을 이루었다.

                   

입체파의 오브제 인식은 관념적 구조로 파악된 고전적 해석 위에 오브제 그 자체를 공존시킴으로서 새로운 물질세계와의 교감을 이루었다. 즉, ‘리얼리티 (reality)’개념으로서 오브제가 처음 등장되어 붓으로 그린다는 전통적인 화면 기법이 아닌 다른 종류의 오브제들을 배열하고 조립하는 방법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입체파 회화에 나타난 오브제의 등장으로 오브제 미술은 예술가가 고 전적 미학의 기준에 관계됨이 없이 일상생활에서 사물을 직접 선택 결정하게 되므로 결국 비 예술이 예술의 문맥 속에 흡수되어 일상과 예술이 동일화를 이루게 되었다.

                   

1910년에서 1911년에 걸쳐 나타난 분석적 입체파의 특징은 회화에 있어서 직감적이고, 시각적인 특질을 완전히 억제하고 대상을 철저히 해체되어지게 하며, 종래의 일정한 시점에서 보여지는 통일적인 회화세계는 찾아 볼 수 없 게 되었다. 이 시기를 통하여 피카소(Picasso 1881-1973)와 브라크(Braque 1882-1963) 두 사람의 화가들은 3차원의 물체를 회화라고 하는 2차원의 세계 로 표현하고자 하는 과제에 매혹되어 물체가 지닌 3차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관객이 그림을 보고 있는 순간에도 그림의 표면이 평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 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입체주의의 피카소와 브라크가 도 달한 대상 분석의 결과는 대상 파악의 새로운 인식개념을 가져왔으며 대상의 실제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의도는 결과적으로 대상을 잃게 하는 모순을 가져 오게 되었고 화면은 평면적 이미지를 부활시켰으며 대상의 리얼리티와 새로 운 관계를 모방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면을 분석적으로 파악하려는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종합적으로 입체주의로의 전환을 특징 지워 주는 것은 ‘빠삐에 꼴레(Papier Colle)’2)였다. 이 기법을 통 해서 등장한 오브제의 이용으로 공간적 깊이감, 색채적 특징, 물체의 질감을 강조해 줌으로써 새로운 조형미를 얻게 되었다.

                   

현실적 이미지를 화면에 나타내기 위한 현실적 오브제를 직접 화면에 도입하 는 방법을 창조해 낸, 그래서 화면 구성상의 효과를 노리거나 어떤 질감의 강 조, 현실감의 표출을 위해 신문지, 악보, 상표 등의 인쇄물을 화면에 부착시킴 으로써 회화가 단순히 외계(外界)의 대상을 재현하는 것으로 그치게 하지 않 고 물체를 직접 부착하여 실재감을 표출시켜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입체 파가 시도한 화면 위의 사물을 붙이는 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오브제라고 할 수 없다. 화면에 붙여진 신문지나 천 조각이 독립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회화에 있어서 평면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체주의자들은 미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여 실제의 사물을 부착하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이 예술상의 혁명을 이루는 과 정에서 많은 기법들, 예컨대 여러 개의 시점, 분해와 재조립, 화면의 색채구성, 문자의 도입, 대상의 기호화, 꼴라쥬3) 등을 고안해 내었다. 이 기법들은 보다 다양하게 펼쳐질 미래의 예술에 그 기반을 제공하게되었다.


1912년경 종합적 입체주의에서 도입된 새로운 표현 매체로서의 꼴라쥬 기법 은 종래의 붓과 물감, 나이프 등에 의한 한정된 표현재료의 고정관념을 무너 뜨리고 표현의 영역을 폭넓게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입체파에 나타난 꼴 라쥬는 평면적인 것으로 신문지나 벽지, 헝겊조각 등을 캔버스에 도입한다는 것은, 그린다는 행위와 이미지를 거부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리고 화가들에 의해 형상적 묘사와 실제의 차이를 연구하는 수단으로서 도입된 꼴라쥬는 캔 버스가 한정되는 공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데서 회화적인 성격을 벗어나 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실제적인 물체이면서 일상적인 이미지를 제거하 지 못한 사물의 파편들이었다. 입체파 화가들은 평면회화의 자율적인 오브제 의 특성을 중요시하고 창조된 오브제와는 달리 화가들에 의해 묘사된 오브제 에 좀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였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새로운 공간 개념의 창조에 실제의 새로운 재료를 이용하 는 실험적인 조형 활동을 하여 순수한 조형적 가치 탐구와 새로운 가치 즉, 물체는 물감이나 잉크 또는 목탄들과 동격의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찾기 위해 실험적인 작업에 열중하였다. 피카소는 꼴라쥬 기법의 사용과 잡다 한 현실의 오브제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작품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빠삐에 꼴레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의 하나로 평가되는 <바이올린과 과일이 있는 정물(1912)>(도판 1)은 한 형태 안에 특정한 오브제의 여러 가지 특징을 집약 시켜 주는 기호의 창조이다.

                   

1912년과 1913년 사이에 제작된 빠삐에 꼴레의 작품들 즉, <기타, 악보, 물 병(1912)>(도판 2), <모자를 쓴 남자(1912-1913)>(도판 3), <테라스, 기타, 물 병(1913)>(도판 4) 등의 작품들은 신문지, 인쇄된 벽지, 색지, 천, 악보 등이 목탄과 연필, 물감 등과 같은 동격의 자격으로 자유롭게 화면을 구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빠삐에 꼴레의 기법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1912년에 그는 이미 입체파의 화가들이 즐겨 다루던 주제 즉, <기타> 를 금속판과 철사 줄을 이용하여 실제 기타 모형으로 입체 구성한 3차원적인 작품으로 구성하고 있다.

                   

1913년과 1914년에 피카소는 다시 나무와 종이, 망치, 침, 고무, 자 등의 실제 생활의 오브제를 집합시켜 구성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조각 적인 공간, 추상적 디자인의 새로운 개념에 대한 그의 구성능력과 개방성을 엮어 준 것이라 하겠 다. <합판위의 기타와 정물(1913)>, <바스병과 물병(1914)>(도판 7), <압생트 술잔(1914)>(도판 8) 등은 좋은 예로서 실제 생활 주변의 오브제를 조립한 ‘앗쌍블라쥬(Assemblage)의 작품들이다. 특히, 1914년에 제작한 <압 생트 술잔>은 청동으로 형을 뜨고 채색하여 조각으로 표현한 것인데 여기서 실제 사물인 숟가락과 설탕덩어리가 포함되었다. 피카소의 꼴라쥬들과 1913년 에서 1914년의 짜임새가 무겁고 복잡한 캔버스들은 아마도 입체주의 화가들이 회화 대상에 대해 품고 있던 강박관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태도일 것이 다. 그들의 강박관념이란, 회화 개념을 외부세계를 모방하거나 그것을 그대로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독자적인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그 자체의 독립 적인 생명을 갖고 있는 실체, 아니면 인위적으로 구성된 오브제로 파악하는 태도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브라크는 피카소와는 달리 조형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지고 미리 그려진 캔바 스 위에다 나무와 대리석의 무늬를 묘사한 벽지조각, 신문지, 악보, 담배갑 등 의 인쇄물을 부착시켜 더욱 풍부한 조형성을 습득하려는 목적으로 빠삐에 꼴 레 기법으로서 화면을 구성하였다. 1913년 제작된 <음악가의 테이블>(도판 9) 작품은 빠삐에 꼴레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분할된 색채와 깊이 감을 주는 종이의 2중성을 최대한 살림으로서 종이 자체의 물질적인 존재성을 강조 하였다. 또한 브라크는 세련되게 색채를 사용하였고 목탄과 동일하게 종이조 각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바아크의 아리아>에서 볼 수 있듯이 몇 조각의 종이와 목탄으로서 공간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빠삐에 꼴레의 계속된 작업으로 1918년 제작된 <기타와 클라리넷>에서 보여주는 기법은 그 이전의 작품과 성질을 달리한 것이다. 우선 화면 전체가 소묘식 이 아니고 색감이 충만해 있으며 빠삐에 꼴레가 조형의 한 요소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작품의 내용을 형성하고 재질감에 의해 즉, 골판지 벽지 등의 배합으로 정감이 나타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브라크 예술의 지속적이며 중요한 관심사는, 화 면에 도입되는 새로운 리얼리티 요소들의 구성적이며 조형적인 기능과 촉각 적, 물질적인 기능이다. “브라크의 빠삐에 꼴레의 단편들을 통해서 볼 때 3가 지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종이의 단편들은 평면적 존재이며, 2차 원의 회화에서 구성적인 요소로서 작용한다. 둘째, 색채와 재질감의 유사성에 의해 단서를 제공함으로써 현실의 사물을 재현 또는 암시한다. 셋째, 종이의 단편들은 그림 안에 도입된 외부세계의 리얼리티로서 종이 자체의 물질적인 존재성을 강조한다.“

                   

이상과 같은 피카소, 브라크에 의한 꼴라쥬 기법의 창안은 조형예술이 대상 을 묘사하는 영역에서 창조적, 이지적, 상상력의 분야로 확장 하는데에 획기적 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계기로 후에 다다이즘은 이 기법을 미술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대결이라는 태도 표명으로서 이용했고, ‘쉬르리얼리즘 (Surrealism)’, ‘누보리얼리즘(Nouveaurealism)’, ‘네오 다다(Neo-Dada)’, 현대의 ‘팝 아트(Pop-Art)’도 큐비즘에서 유래되는 꼴라쥬의 이념으로부터 새로운 물 체의 교류로 이어지게 되었다.

                   

1916년 제 1차 세계대전 중 스위스 쮜리히에 있는 볼테르 '카바레(Cabaret Voltaire)'에서 휴고.발(Hugo Ball), 트리스탄.짜라(Tristan Tzara), 한스. 아르프(Hans. Arp), 마르실.장코, 그리고 리차드.휠젠백 등이 모여 20세기에 접어들어 가장 혁신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는 ‘다다이즘(Dadaism)’을 일으켰 다. “다다는 온갖 것을 거부했다. 예술을 거부하고 도덕, 사회를 거부하였으며 인간의 모든 것을 거부한 끝에 다다이스트들은 그들 스스로도 다다이기를 거 부했다.”                   

전쟁의 고조된 열기 속에서 전쟁의 불안과 흥분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다다주 의는 예술적인 운동이기에 앞서 하나의 부정과 정신적 반항의 울부짖음이었 다. 미술비평가 이자 다다이스트 였던 트리스탄 짜라는 “다다는 하나의 예술 형식으로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혐오감으로부터 시작되고있다”7)고 하 였다. 예술에 있어서 다다는 기존의 모든 전통이나 가치, 이성의 우위성, 예술 형식, 권위 등을 부정 파괴하고 불합리적인 것, 비이성적인 것, 비 미적인 것, 비도덕적인 것을 찬미하면서 일종의 파괴적, 부정적, 허무주의적 경향을 주장 하면서 예술의 새로운 개념을 설정하고자 하였다.
쮜리히에서 출발한 다다주의는 뉴욕, 베를린, 하노바, 파리등으로 확산되었으며 입체파에서 출발한 꼴라쥬는 다다로 이어지면서 다다정신에 맞게 변형 발 전되었다. 즉 다다주의자들이 선택한 오브제는 당연히 부정적 요소로서 특정 지워졌으며 꼴라쥬 또한 하나의 표현이기보다는 기존 가치의 부정과 파괴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 예로 쮜리히 다다의 ‘파타갸즈 꼴라쥬fatagaga collage’ 는 아무 의미도 없는 넌센스의 작품을 제작 한다는 뜻으로 다다의 허 무적이고 불합리한 정신을 반영하며, 독일의 베를린 다다에서는 ‘포토 몽타쥬 Photo montage’8)를 정교하게 발전시켰고, 이 시기에 하노버에서는 슈빗터즈 (Kurt Schuitters)가 일상생활의 폐품들을 수집하여 화면에 붙이는 <메르쯔 꼴라쥬Merz collage>를 창안하여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하 는 예술의 종합화를 위한 노력으로 삶의 형태를 확장하려 하였다. 다다는 예 술인 동시에 반 예술인 것이다. 이들 다다주의자들에게 보다 높은 차원의 의 미를 주었던 것은 ‘우연’ 이었다. 이 우연의 신봉자인 한스 아르프는 그 법칙 에 대해 철저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우연은 예술 창작의 새로운 자극제로서 인식되어야 한다는 바로 이러한 실험 작업이 곧 다다를 다른 예술과 구별시키 는 점이었다.

한스 리치트(Hans Richter)는 “우연은 우리로 하여금 의도적인 표현과 인과 성이라는 장애물을 뛰어 넘을 수 있게 하고 지각과 내면의 눈을 보다 예리하 게 만드는 마법적 절차였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다다이즘은 우연성과 비

                                  

논리를 예술 창작의 새로운 자극제로 삼아 합리적인 것과 의도적으로 구별함 으로써 새로운 예술형식과 소재를 추구하여 그 후 어떤 기법, 어떤 절차에도 편견을 갖지 않고 개별 예술들의 한계를 뛰어 넘게 되었다. 이를테면 꼴라쥬 에서 레디 메이드로 다시 앗쌍블라쥬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다다의 이러한 정신과 같이 무엇에도 구속되거나 속박 당함이 없이 예술 창 작의 수단을 확대시키려는 노력은 다다이즘의 선구자격인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이 레디 메이드라는 기성품을 예술로 승격화 시킴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1913년 마르셀 뒤샹의 최초의 오브제 <자전거 바퀴 >는 평면에서 완전히 독립된 하나의 레이디 메이드 오브제로 등장하 게 되는데 이것은 부엌용 탁자위에 자전거 앞바퀴를 거꾸로 붙여 만든 데서부 터 시작된다. 그 후 1917년 뉴욕의 앙데빵당展에 <샘>이란 제목 하 에 변기를 출품하게 되면서 발생한 리차드.뭇트 사건은 오브제 역사에 있 어서 또 하나의 급진적인 선언이 이루어지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뒤샹의 오브제는 처음부터 사물의 재구성을 거부하기 위한 원소이거나 질료가 아니라 전적으로 “보아왔던 것”으로서 일상적인 사물이자 이미 쓰여지고 있던 기성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성품의 변기가 하나의 오브제로 탈바꿈 되기 위해서는 장소의 연출이 필요하다. 장소의 조작을 통해서만이 레디 메이 드는 “보아왔던 것”의 이미지에서 해방되고 동시에 일상적인 사물의 라벨을 떼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레디 메이드 는 하나의 공업제품이 일상적인 맥락으로부터 가능한 독창적인 방법으로 이탈되어 본래의 기능을 철저하게 상 실할 경우, 이러한 오브제를 의미하며” 여기서 뒤샹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시 간성이며 순간이다. 그는 레디 메이드를 “우연을 통조림으로 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양쪽 모두 물체라는 존재는 늘 특수하며 더구나 우연성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라는 인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뒤샹의 작품은 두 가지의 의의 를 갖고 있는데 그 하나는 지금까지 정통성을 가진 예술에 모욕을 준 점과 또 하나는 시판되고 있는 비 예술적인 실용품에까지 美의 가치를 부여한 점이었 다. 그는 변기를 다만 선택했을 뿐이다. 그는 흔해 빠진 물건을 하나 선택하여 명제를 붙여 실용적 역할이 없어지게 하였다. 즉 뒤샹은 물체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뒤샹이 레디 메이드에 의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닌 관점의 가능 성을 제공하는 객관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있을 때 이와 반대로 슈빗터즈의 경우는 인간의 손때가 묻은 일상의 폐품들을 그의 질 서속에 끌어들여 조형적 오브제를 줌으로써 조형적 오브제 개념을 형성함은 물론 폐품 미학의 근원을 구축하였다.

                   

결국 이러한 레디 메이드 는 한스 아르프, 프란시스 피카피아(F. picabia) 등 에 의해 1917년에서 1922년 ‘다다(Dada)’ 전시회에 발표된 많은 꼴라쥬들과 함 께 앗쌍블라쥬의 기초가 되었다.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자주하는 질문 FAQ에 대하여

프랑스는 수준 높은 대학 교육제도와 외국인도 프랑스인과 같은 혜택으로 대학교 등록금 없이 최소의 비용으로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요즘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프랑스유학은 인기가 많습니다.


프랑스 유학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주목해서 아래글을 보세요!


* 프랑스 대학 입학 조건

프랑스대학에 입학하려면 

1. 고등학교졸업증명서 또는 검정고시 합격증 필요합니다.

2. 프랑스에는 BAC.라고 하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이 있는데 이것에 해당하는 서류는 한국에서 전공에 상관없이 4년제든  전문대든 대학교에 합격증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유럽 대학교에 학비가 없는 공교육 대학교를 찾을때 프랑스와 독일 국립대학교에 대해서 조사를 많이 하는데, 프랑스에 대학 입학 조건은 독일대학 입학조건 보다 덜 까다롭습니다.  다음은 언급한 사항은 독일 대학에 입학 조건입니다.  공통적으로 2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 - 한국 대학수학능력시험 (수능) 점수 평균 4.4등급 이상, - 한국 고등학교(3년 간) 국어/영어/수학/과학 내신 7등급 이상


* 저의 오픈채팅방에거 학생들이 자주 하는 질문을 모아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Q. 수능 점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죠? / 수능 시험 등급이 낮은데 어떻게 하죠?

A.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수능점수나 등급을 보지 않습니다.


Q. 우리나라에서 대학교 재학 중인데 프랑스 학사 입학이 가능한가요?

A. 가능합니다. 프랑스에 학사 편입을 할때 한국에서 취득학점에 따라 편입 학년이 정해지니 취득학점 체크를 잘 하시면 됩니다.


Q. 예술, 미술, 음악 등 실기가 필요한 전공의 경우에도 입학 조건이 동일한가요?

A. 실기가 필요한 전공의 경우에도 입학 조건은 동일하지만, 일반 프랑스 대학이 아닌 미술대학인 보자르인  ECOLE의 경우 학업과 무관하게 CONCOURS라고 하는 경쟁시험을 통해 입학이 가능합니다.


Q. 프랑스에 유명한 대학은 어디인가요? 또는  저에 희망 전공으로 유명한 대학은 어디인가요?

A. 프랑스 일반대학은 영국이나 미국처럼 TOP 10/30/50위 등의 랭킹을 따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일반대학이 정부 지원로 운영하기 때문에 동일한 조건에서 대학이 운영되기 때문에 교육 수준도 비슷합니다. 이에 프랑스 일반 대학의 랭킹을 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경쟁시험을 통해 선발하는 그랑제꼴이나 예술계 학교인 보자르, 아르데코 등등 미술대학교는 명문미술대학교는 존재합니다.


Q. 프랑스는 대학을 다니면서 일을 할 수 있나요?

A.  프랑스 대학에 입학한 경우 학교를 다니면서 학생 비자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재학 중 보다는 방학기간에 풀 타임으로 일을 하는 편이고, 물론 재학 중에도 파트타임 아르바이트가 가능합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최대 18개월까지 합법적으로 일을 하면서 프랑스에 체류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에 취업 준비를 하고 취업 후에 취업 비자로 전환이 가능합니다. 


Q. 프랑스 대학 졸업 후 현지에서 취업이 가능한가요?

A.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기 때문에 프랑스 유학생들은 미국이나 영국 등 다른 해외 취업 보다 높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어서 취업이 가능합니다.


Q. 프랑스 국립대학은 정말로 학비가 무료인가요?

A. 프랑스는 소수의 사립 대학을 제외한 모든 대학이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학비가 무료이거나 저렴합니다. 대략 1년 등록비는 30에서 80만원정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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